까치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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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병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9.♡.55.122) 댓글 0건 조회 5,309회 작성일 11-01-28 14:32본문
까 치 밥
이 병 수
늦가을 낙하의 계절, 문학기행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버스 창문 너머의 경관을 바라보니, 단풍잎도 거의 지고, 열매도 다 떨어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도 빨간 감이 군데군데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마치 저물어 가는 가을의 꽃으로 삭막한 늦가을을 장식이라도 하는 듯 돋보인다.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어릴 적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다. 동편의 두 그루는 대감이라 하여 알이 잘지만 많이 열렸고, 서편의 두 그루는 단성감이라 하여 납작한 큰 감이 열렸다. 나머지 한 그루는 고종시(柿)로 굵고 살이 많아, 광의 독 안에 묻어두었다가 겨울에 홍시가 되면 꺼내 먹었다.
수백 접도 넘는 감을 따는 데는 상당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어릴 적 나도 가사를 돕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 감을 따 본 적이 있다. 감 따는 도구로는 기다란 장대 끝에 막대기를 비스듬히 줄로 매어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무 위에 올라 이를 가지 사이로 넣어서 가지를 비틀어 꺾어서는 살살 댕겨 망태기 속에 담는 작업이다. 만약 실수하여 꺾은 감을 떨어뜨리는 날에는 땅바닥에서 박살이 나버리니 기술을 요한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까치밥을 한 나무에 여남은 개씩은 남겨 두라고 하시면서 짐승에게 베푸는 자선심을 잊지 않으셨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지금 가지의 정상에 매달려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까치밥의 심정이 어떠할까? 저들은 봄, 여름, 가을을 지내는 동안에 살아남기 위해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자랐다. 빨갛게 숙성되기까지에는 수많은 동기(同氣)들이 낙하 신세로 떨어져나가지 않았던가? 그간 모진 풍우나 벌레와도 싸우면서 무한한 매달리기 경쟁을 벌인 끝에 고통을 이겨내고서 드디어 영광스러운 홍실(紅實)의 대열에 끼일 수 있었을 터이다. 한창 탐스러운 모습이 절정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함께 태어난 동료들이 모두 인간의 먹을거리로 보시(布施)의 길로 떠나버리고 몇몇 친구만이 남게 되었으니 지금 그들의 심정이 어떠할까?
두 가지 경우가 연상된다. 저 까치밥은 지금 수많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외로운 정감 속에 빠져 한창 불만에 가득 차 비관적으로 신세타령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위한 봉사의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수많은 동료 중에서 까치밥으로 선발된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전자는 부정적 사고, 후자는 긍정적 사고를 바탕 하여 나온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을는지는 까치밥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까치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내가 인생의 까치밥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지난 역정을 돌아보면, 나에게도 청록의 시절을 지나 홍실(紅實)의 시대와 같은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같은 보람에 찬 시기는 흘러가고, 언제 염라대왕의 호출장을 받을지 모르는 까치밥과 같은 시점에 와 있다.
회갑을 지난 지는 벌써 까마득하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杜甫)의 시에서 유래되었다는 고희(古稀) 잔치도 치른 지 이미 7년이 되었으니 새해에는 싫건, 좋건 간에 희수(喜壽)를 맞아야 할 처지에 있다.
초등학교 동기생 25명 중 현재 생존자는 눈을 닦고 찾아도 5명밖에 없고, 사범학교 동기생 50명 중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벗이 5, 6명에 불과하다.
이 모두가 까치밥 신세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수많은 동기생 중에서 험난한 세상을 살고서도 남아 있다는 것은 선택된 복 받은 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기기에 감사하고도 감사하기 그지없다.
장수(長壽)가 오복(五福)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이만하면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데 이미 나는 까치밥 신세가 되었으니 언제 어느 ‘까치 사자(使者)’에 의해 붙들려 갈지 모른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유골을 산과 들에 뿌려 까치밥으로 삼게 함으로써 자연으로 돌아감을 미풍으로 여긴다.
감나무에 달린 저 까치밥은 날짐승에게 봉사하기 위해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 인생에서의 까치밥이 된 나는 무엇을 위해 남아 있다고 할 것인가? 까치밥이 늦가을 풍경의 꽃으로 남아, 경관의 삭막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쓰듯이, 나도 저물어가는 인생의 고비에서나마 마지막 삶의 여향(餘香)을 풍기다 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사념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벌써 우리 일행은 하차지점에 도착했다.
이 병 수
늦가을 낙하의 계절, 문학기행에서 돌아오는 길이다.
버스 창문 너머의 경관을 바라보니, 단풍잎도 거의 지고, 열매도 다 떨어져 버렸다. 그런 가운데도 빨간 감이 군데군데 달려 있는 것이 보인다. 마치 저물어 가는 가을의 꽃으로 삭막한 늦가을을 장식이라도 하는 듯 돋보인다.
감나무에 달린 까치밥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은 어릴 적 고향집으로 달려갔다. 고향집에는 감나무가 다섯 그루 있었다. 동편의 두 그루는 대감이라 하여 알이 잘지만 많이 열렸고, 서편의 두 그루는 단성감이라 하여 납작한 큰 감이 열렸다. 나머지 한 그루는 고종시(柿)로 굵고 살이 많아, 광의 독 안에 묻어두었다가 겨울에 홍시가 되면 꺼내 먹었다.
수백 접도 넘는 감을 따는 데는 상당한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었다. 어릴 적 나도 가사를 돕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가 감을 따 본 적이 있다. 감 따는 도구로는 기다란 장대 끝에 막대기를 비스듬히 줄로 매어 가위 모양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나무 위에 올라 이를 가지 사이로 넣어서 가지를 비틀어 꺾어서는 살살 댕겨 망태기 속에 담는 작업이다. 만약 실수하여 꺾은 감을 떨어뜨리는 날에는 땅바닥에서 박살이 나버리니 기술을 요한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언제나 까치밥을 한 나무에 여남은 개씩은 남겨 두라고 하시면서 짐승에게 베푸는 자선심을 잊지 않으셨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다.
지금 가지의 정상에 매달려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저 까치밥의 심정이 어떠할까? 저들은 봄, 여름, 가을을 지내는 동안에 살아남기 위해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 자랐다. 빨갛게 숙성되기까지에는 수많은 동기(同氣)들이 낙하 신세로 떨어져나가지 않았던가? 그간 모진 풍우나 벌레와도 싸우면서 무한한 매달리기 경쟁을 벌인 끝에 고통을 이겨내고서 드디어 영광스러운 홍실(紅實)의 대열에 끼일 수 있었을 터이다. 한창 탐스러운 모습이 절정의 문턱에 이르렀을 때, 함께 태어난 동료들이 모두 인간의 먹을거리로 보시(布施)의 길로 떠나버리고 몇몇 친구만이 남게 되었으니 지금 그들의 심정이 어떠할까?
두 가지 경우가 연상된다. 저 까치밥은 지금 수많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외로운 정감 속에 빠져 한창 불만에 가득 차 비관적으로 신세타령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을 위한 봉사의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니, 수많은 동료 중에서 까치밥으로 선발된 것을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전자는 부정적 사고, 후자는 긍정적 사고를 바탕 하여 나온 것이다. 어느 쪽이 맞을는지는 까치밥의 말을 들어보아야 하겠다.
까치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내가 인생의 까치밥이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의 지난 역정을 돌아보면, 나에게도 청록의 시절을 지나 홍실(紅實)의 시대와 같은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같은 보람에 찬 시기는 흘러가고, 언제 염라대왕의 호출장을 받을지 모르는 까치밥과 같은 시점에 와 있다.
회갑을 지난 지는 벌써 까마득하고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두보(杜甫)의 시에서 유래되었다는 고희(古稀) 잔치도 치른 지 이미 7년이 되었으니 새해에는 싫건, 좋건 간에 희수(喜壽)를 맞아야 할 처지에 있다.
초등학교 동기생 25명 중 현재 생존자는 눈을 닦고 찾아도 5명밖에 없고, 사범학교 동기생 50명 중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벗이 5, 6명에 불과하다.
이 모두가 까치밥 신세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나 수많은 동기생 중에서 험난한 세상을 살고서도 남아 있다는 것은 선택된 복 받은 자라 할 수 있겠다. 그러기기에 감사하고도 감사하기 그지없다.
장수(長壽)가 오복(五福) 중의 하나라고 한다면, 이만하면 내가 행복하다는 생각도 든다. 한데 이미 나는 까치밥 신세가 되었으니 언제 어느 ‘까치 사자(使者)’에 의해 붙들려 갈지 모른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화장을 하고, 유골을 산과 들에 뿌려 까치밥으로 삼게 함으로써 자연으로 돌아감을 미풍으로 여긴다.
감나무에 달린 저 까치밥은 날짐승에게 봉사하기 위해 남아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럼, 인생에서의 까치밥이 된 나는 무엇을 위해 남아 있다고 할 것인가? 까치밥이 늦가을 풍경의 꽃으로 남아, 경관의 삭막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고 애쓰듯이, 나도 저물어가는 인생의 고비에서나마 마지막 삶의 여향(餘香)을 풍기다 가야 할 것이 아닌가 하는 사념에 빠져들었다.
그 사이에 벌써 우리 일행은 하차지점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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