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목을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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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병수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59.♡.55.122) 댓글 0건 조회 6,281회 작성일 11-01-28 17:33본문
고사목을 바라보면서
이병수
나는 지금 지리산에 올라 일대에 늘어 서 있는 수많은 고사목(枯死木)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오른쪽을 보나 왼쪽을 보나,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온통고사목만이 눈에 띄어 마치 고사목의 열병식을 보는 듯하다.
어제 오후 2시에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부산을 출발,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를 거쳐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주봉인 천왕봉을 답파하고 내려오는 길에 장터목산장 근처 제석봉(帝釋峰)에 온 것이다.
지리산은 높이가 1,951m나 되는 웅장한 산이요, 천연 식물원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많은 수종(樹種)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건마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일대만은 살아있는 식물이라고는 땅바닥에 약간의 풀[草木]이 깔려 있을 뿐, 나무라고는 거의 볼 수가 없어 이채로운 광경을 이루고 있다. 지난날 잦은 등산길에서 고사목들을 간혹 보기는 하였지만 오늘 이곳처럼 광활하게 고사목이 수해(樹海)를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곳은 처음 보는 것이다.
우선 그 양감(量感)에 의한 웅장미에 황홀하여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세상에 어찌 이다지도 광활한 고사목의 수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 고사목 지대를 더욱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얼핏 보기에 이곳은 ‘나무의 저승’이라고 해야 할지? 어쩌면 저 고사목들은 지금 나무 세계의 염라대왕으로부터 제각기 나무로서의 한 살이[一生]에 대하여 평가를 받고, 문초를 받고, 최종적인 판결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고사목들은 잎이 붙어 있는 나무들 속에 끼어 서 있을 적에는 죽은 나무이지만, 고사목들만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것을 볼 적엔 도무지 죽어 있는 나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선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그러하고, 그의 몸체에서 하얗고 반짝반짝한 윤이 나서, 보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그러하다. 만약에 저 고사목이 완전 기진(氣盡)하여 숨이 거두어졌다고 하면 어찌 저렇게 꼿꼿이 제 몸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저렇게 윤택미를 발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나무에 못지않은 생동감에 감동을 금할 수 없다.
고사목을 바라보면서 나는 맥아더 장군이 6. 25때 한국전에서 전략상의 의견 차이로 본국으로 소환당하여 가서 미국의회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뿐이다.” 라고 한 구절이 연상된다. 저 고사목이야말로,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분명히 죽지 않고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저 고사목에 잎이 달려 있을 적엔 해마다 낙엽을 흘려 어린 풀, 나무에게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거니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꿋꿋이 서서 몸체에서 진을 내어 그러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헌신적인 삶의 자세에 고개가 숙여진다.
헌신적인 삶의 자세, 이 얼마나 고귀하다 할 것인가? 이 사회에도 헌신적인 자세로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사례들이 많다. 암흑대륙에 자진하여 들어가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미개인들의 질병을 돌보면서 평생을 바친 러셀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노동으로 힘겹게 번 돈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낙을 삼는 지게꾼도 있고, 평생을 김밥 장사 하여 모은 거액의 재산을 인재 양성 기관인 대학에 아낌없이 몽땅 털어 기증한 할머니도 있다. 모두가 나 아닌 남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생을 보람 있게 살고 있는 것이니, 저 고사목의 한 살이와도 같이 얼마나 값진 삶이라 하겠는가?
저 고사목들은 해발 2천 미터나 되는 산의 비탈에서 태어나 수 십 년, 수 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선 자리를 탓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불평 없이 자기 임무를 다하고 말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오늘 이곳 지리산에 와서 고사목으로부터 참으로 위대한 가르침을 받는 듯했다.
인생의 정리기에 접어든 나는, 우리 사람도 저 고사목처럼 자연의 섭리를 좇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고 주어진 분수대로 성실히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병수
나는 지금 지리산에 올라 일대에 늘어 서 있는 수많은 고사목(枯死木)을 바라보고 서 있다. 오른쪽을 보나 왼쪽을 보나,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온통고사목만이 눈에 띄어 마치 고사목의 열병식을 보는 듯하다.
어제 오후 2시에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부산을 출발,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를 거쳐 법계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아침에 주봉인 천왕봉을 답파하고 내려오는 길에 장터목산장 근처 제석봉(帝釋峰)에 온 것이다.
지리산은 높이가 1,951m나 되는 웅장한 산이요, 천연 식물원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많은 수종(樹種)의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건마는, 내가 지금 서 있는 이 일대만은 살아있는 식물이라고는 땅바닥에 약간의 풀[草木]이 깔려 있을 뿐, 나무라고는 거의 볼 수가 없어 이채로운 광경을 이루고 있다. 지난날 잦은 등산길에서 고사목들을 간혹 보기는 하였지만 오늘 이곳처럼 광활하게 고사목이 수해(樹海)를 이루어 장관을 연출하고 있는 곳은 처음 보는 것이다.
우선 그 양감(量感)에 의한 웅장미에 황홀하여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세상에 어찌 이다지도 광활한 고사목의 수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이 고사목 지대를 더욱 유심히 바라보고 있다. 얼핏 보기에 이곳은 ‘나무의 저승’이라고 해야 할지? 어쩌면 저 고사목들은 지금 나무 세계의 염라대왕으로부터 제각기 나무로서의 한 살이[一生]에 대하여 평가를 받고, 문초를 받고, 최종적인 판결이 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이 고사목들은 잎이 붙어 있는 나무들 속에 끼어 서 있을 적에는 죽은 나무이지만, 고사목들만이 즐비하게 늘어 서 있는 것을 볼 적엔 도무지 죽어 있는 나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다. 우선 꼿꼿하게 서 있는 것이 그러하고, 그의 몸체에서 하얗고 반짝반짝한 윤이 나서, 보는 이에게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이 그러하다. 만약에 저 고사목이 완전 기진(氣盡)하여 숨이 거두어졌다고 하면 어찌 저렇게 꼿꼿이 제 몸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 있겠는가. 어디에서 저렇게 윤택미를 발할 수 있겠는가. 살아있는 나무에 못지않은 생동감에 감동을 금할 수 없다.
고사목을 바라보면서 나는 맥아더 장군이 6. 25때 한국전에서 전략상의 의견 차이로 본국으로 소환당하여 가서 미국의회에서 행한 마지막 연설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져 갈 뿐이다.” 라고 한 구절이 연상된다. 저 고사목이야말로, 맥아더 장군의 말처럼 분명히 죽지 않고 사라져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저 고사목에 잎이 달려 있을 적엔 해마다 낙엽을 흘려 어린 풀, 나무에게 자양분을 제공해 주었거니와, 지금 이 순간까지도 쓰러지지 아니하고 꿋꿋이 서서 몸체에서 진을 내어 그러한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헌신적인 삶의 자세에 고개가 숙여진다.
헌신적인 삶의 자세, 이 얼마나 고귀하다 할 것인가? 이 사회에도 헌신적인 자세로 삶을 살아감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 주는 사례들이 많다. 암흑대륙에 자진하여 들어가 갖은 고난을 무릅쓰고 미개인들의 질병을 돌보면서 평생을 바친 러셀의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우리나라에서도 자신의 노동으로 힘겹게 번 돈을 자기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으로 낙을 삼는 지게꾼도 있고, 평생을 김밥 장사 하여 모은 거액의 재산을 인재 양성 기관인 대학에 아낌없이 몽땅 털어 기증한 할머니도 있다. 모두가 나 아닌 남을 위하여 헌신함으로써 생을 보람 있게 살고 있는 것이니, 저 고사목의 한 살이와도 같이 얼마나 값진 삶이라 하겠는가?
저 고사목들은 해발 2천 미터나 되는 산의 비탈에서 태어나 수 십 년, 수 백 년을 살아오는 동안 자연의 섭리에 따라 온갖 풍상을 겪으면서도 자기가 선 자리를 탓하지 아니하고, 아무런 불평 없이 자기 임무를 다하고 말없이 사라져 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때, 나는 오늘 이곳 지리산에 와서 고사목으로부터 참으로 위대한 가르침을 받는 듯했다.
인생의 정리기에 접어든 나는, 우리 사람도 저 고사목처럼 자연의 섭리를 좇아 아무런 불평을 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순간까지 욕심을 부리지 아니하고 주어진 분수대로 성실히 살다가 조용히 사라져 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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